신라 무덤이야기 2

역사기행 길라잡이 동대신문l승인2022.08.0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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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시대를 대표하는 대형무덤

삼국통일 전후 작아지고 도시 외곽으로

백제를 대표하는 부여·공주, 가야를 대표하는 김해·고령 등의 도시들과 신라를 대표하는 경주의 공통점은 천년이 넘는 대형무덤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시와 경주는 분명 차이점이 있으니 바로 무덤의 크기와 그 위치이다.

경주의 대형무덤들은 최고 23m에 달할 정도로 여느 도시들의 무덤에 비해 월등히 크며 그 위치 또한 타 도시의 경우 도시의 외곽 구릉이나 완만한 산지에 있으나 경주의 경우 시내 한가운데라 할 수 있는 번화가에 있다는 것이다.

▲ 고령 대가야박물관 주변의 지산동 고분군.

경주 번화가에 있는 대형무덤들은 대부분이 4C 중반부터 6C 중반까지 2백여 년 동안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임금을 마립간이라 부르던 시기로 임금의 권력이 강화되던 때라 마립간의 위엄이 돋보이도록 무덤을 더 크게 만든 것이며 껴묻거리(부장품) 또한 엄청난 양을 자랑한다.

마립간과 관련 삼국사기는 19대 눌지왕(재위 417~458)부터 22대 지증왕까지 등 4대의 임금을, 삼국유사는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에서 22대 지증왕(재위 500~514)까지 6대의 임금을 마립간이라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설을 따른다.

▲ 마립간 시대 돌무지덧널무덤을 대표하는 황남대총. 높이 23m, 남북길이 120m, 무덤 둘레가 400m에 이르는 국내 최대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503년(지증왕 4) 우리가 흔히 칭하는 왕이라는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며 마립간의 시대는 끝나고 527년(법흥왕 14) 불교가 신라의 국교로 공인되며 무덤의 크기는 10m 이하로 대부분 작아지고 껴묻거리 양 또한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승에서와 같이 저승에서도 화려한 삶을 추구하며 껴묻거리를 넣던 풍습이 불교의 공인과 함께 극락왕생을 추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껴묻거리도 줄어들고 무덤의 크기도 작아지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신라 초기, 궁궐인 월성 주변을 중심으로 작은 도시를 이루던 서라벌은 삼국통일 후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당나라 장안을 벤치마킹한 계획된 신도시가 건설되고 도시가 팽창하다 보니 도시 외곽에 있던 마립간 시대의 대형무덤들이 신도시 안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 도심에 있는 사적 대릉원 일원(왼쪽)과 산에 있는 사적 서악동 고분군(오른쪽). 사진 출처=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후 만들어지는 무덤들은 당연히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다 보니 분지 지형인 경주의 중심이 아니라 외곽인 산 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번화가의 무덤들은 삼국통일 이전 마립간 시대 전후의 무덤들이 대부분이며 외곽의 무덤들은 다수가 삼국통일 이후의 무덤들이다.

▲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보여주는 천마총 내부.

마립간 시대 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돌무지덧널무덤(구, 적석목곽분)이라는 신라만의 독특한 무덤 양식으로 나무로 만든 널(관)과 껴묻거리 상자를 안치한 후 덧널을 만들고 그 위에 엄청난 양의 돌을 쌓아 무덤을 보호하고 방수를 위한 진흙을 바른 후 흙을 쌓아 만든 무덤이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나무 널에 안치된 무덤 주인은 머리에서 발까지 금과 은 혹은 금동으로 만든 귀걸이, 반지,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를 남녀 모두 착용하고 있으며 금관 혹은 금동관으로 얼굴을 가리고

▲ 돌방무덤 내부를 볼 수 있는 사적 구정동 방형분(왼쪽)과 독특한 호석이 인상적인 사적 신문왕릉(오른쪽).

있는데 일반인들이 무덤 주인의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큰칼을 허리에 차고 있는가의 유무로 칼을 차고 있는 쪽이 당연히 남성이며 여성의 무덤에서도 큰칼이 출토되나 그 위치는 널 내부가 아니라 껴묻거리 상자가 대부분이다.

삼국통일 이후 무덤은 돌로 방을 만들고 통로를 만든 돌방무덤의 형식이 대부분으로 엄청난 양의 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에 비해 도굴이 쉬워 대부분 도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돌방무덤은 통로까지 만들었기에 합장이 쉽다는 장점이 있으며 후대로 갈수록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이 화려해지고 십이지 신상과 같은 조각도 첨가되며 난간을 두르는 등 외관이 화려하게 변화해 가는 것이 특징이라 시대별 무덤의 외형을 보러 다니는 것도 역사기행의 한 테마로 만들어질 정도이다.

이 진 호

문화유산해설사 / 신라마을 대표

 

▲ 십이지 신상이 독립상으로 처음 배치된 것으로 보는 사적 성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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