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정신

1980년 5월 18일를 기억하며 권가영 수습기자l승인2022.06.2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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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쯤은 격한 분노를 표출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출처=연합뉴스,"전두환, 5.18 당시 광주서 특수 공작부대 운영")

 

광주 5.18사태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8일 새벽까지 광주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평화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군부 세력은 실탄을 시민군을 향해 쏘았고, 공식적인 사망자는 193명, 부상자 3,139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376명, 구속과 고문 피해는 1,589명, 행방불명은 65명으로 밝혀졌으나 사실상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광주사태 전개 과정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12.12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고 새로운 실권자가 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정치 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 보도 검열 강화’라는 계엄령 10호를 내렸다. 광주 지역 학생들은 ‘전두환 퇴진’을 외쳤고 5월 18일 16시 광주 일대로 투입된 군부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에게도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이를 목격한 광주 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으며 10대부터 중장년층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거리로 뛰어들어 계엄군과 사투를 벌였고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커졌다. 5월 21일 13시에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 후 철수했다. 같은 날 저녁,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 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에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진압은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를 당한다. 그 결과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가 부서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지는 부상을 당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월의 막내라고 불리는 전재수 희생자는 어느때와 같이 친구들과 뛰어놀다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지게 되었다. 그 당시 전재수 희생자는 초등학생이었다. 이를 통해 계엄군은 시민군을 포함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에게도 총을 겨눴다는 걸 알 수 있다.

 

광주사태의 의의

광주 5.18은 신군부 세력에 진압되었지만, 이후 6월 항쟁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다른 국가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 아시아 각 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또한 민중들의 민주화 의지를 겉으로 표출하였다는 의의를 들 수 있다. 또한 광주 5.18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와 민주적인 발전의 원동력임을 확인시켜 주는 과정이었다. 이 운동은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그리고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 진보 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던 당시에 시민들이 보여 주었던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및 공동체 정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는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존재한다.

 

권가영 수습기자  kgy85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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