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못할 이유가 없다

동대신문l승인2022.01.2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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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시인    이미출판사 대표

해외 유학을 한 적이 없고, 영국이나 미국 호주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영어(회화)를 배웠냐고 내게 묻는 지인들이 있다. 내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지는 않지만 내 또래들에 비하면 영어 발음이 괜찮은 편이고, 외국어에 대한 공포감이 크지 않다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겠다. 어학 공부는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 언어란 숨 쉬는 공기와 같아서, 나도 모르게 배울 때가 많다. 한국어 회화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다 한국말을 하지 않나. 외국어를 배운다고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외국어에 익숙해지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외국어 공부에 효과적이지 않을까. 

아버지의 선견지명 덕분에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미국인들에게 생생한 영어를 듣고 배울 수 있었다. 수업료를 전혀! 내지 않고 공짜로 영어회화를 배우고 짜장면도 얻어먹고 미국의 대학생과 탁구도 치며 친구가 된 이야기. 여고 1학년 겨울방학 때였던 것같다. 아버지가 나를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지금은 사라진 서울의 명소: 일제시대 때 유명한 요리집이었는데 1919년 3`1 만세 때 민족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했던 곳. ) 건물로 데려갔다. 

내가 여고생이던 1970년대 후반, 태화관 1층에서 일요일마다 한국에 와 있는 미국인들이 참석하는 기독교의 예배 의식이 진행되었다. 한국에 파견된 외교관이나 미군 군속 가족들, 드물지만 미국인 유학생들도 참석했고, 나처럼 공짜로 영어를 배우려는 한국사람들도 더러 예배당 주위를 어른거렸다. 1시간 남짓 진행되는 예배는 지루했고, 한국말로 하는 예배도 지루한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말씀은 지루하다 못해 지겨웠지만, 그 지루함을 참으면 달콤한 시간이 시작된다는 믿음에 억지로 견디었다. 태화관의 주일예배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고, 나처럼 예배 시간에 늦어 헐레벌떡 뛰어온 한국인들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서있기 일쑤였다. 의식이 끝난 뒤 태화관 2층으로 올라가면 영어로 성경을 배우는 ‘바이블 클라스’가 시작되었다. 
바이블 클라스를 진행하는 선생님은 물론 미국인, 교양있고 점잖은 젊은 남자였다. 바이블 클라스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한국에 잠시 와 있는 미국 관리들의 어린 자녀들도 있었고, 지금도 내가 그 이름을 기억하는 리사처럼 연대에 유학 중인 미국 학생도 있었고, 직업이 뭔지 알 수 없으나 신앙심이 남다른 파란 눈의 아저씨도 있었고, 신앙심은 쥐뿔도 없지만 영어회화를 배우러 오는 한국인들을 꼬셔 과외지도를 하려는 수상한 한국의 배불뚝이 학원강사도 (자신을 학원강사로 소개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는 학원강사가 아니라 그냥 사기꾼이었던 것같다) 있었고, 대다수는 영어를 배우려는 선량한 한국인 대학생 오빠 언니들이었다. 

나는 1978년 태화관의 바이블 클라스에 참석한 유일한 고교생이었다. 회색 교복에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발랄한 소녀인 나는 대학생 오빠 언니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성경 공부가 끝나면 그냥 헤어지지 않고 빵과 커피를 마시거나 근처의 중국집에서 더치 페이로 함께 점심을 먹었다. 모임에 한국사람이 더 많은데도 우리는 바이블 클라스 앞뒤의 쉬는 시간은 물론 성경공부가 끝난 뒤 식사시간에도 영어로 소통했다.  
엄마가 마시지 말라는 커피를 나는 그곳에서 보란듯이 마셨고, 미스 리사 (Lisa)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종로 거리를 걸었고, 어울려 탁구를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점심 값을 낼 돈이 없는데 적당히 빠져나오지 못한 하루를 일기장에 무려 열세 줄에 걸쳐 반성했던 날도 있다. 

딸 자식을 외교관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꿈처럼 외교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태화관 영어성경반에서 십대의 한때를 보낸 덕분에, 언제 어디서 외국인을 만나도 두렵지 않다. 내 영어가 통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멜버른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의 세미나에서 통역 없이 영어로 발표했고 80년대 학생운동과 아시아 미투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유창한(?) 영어로 답할 수 있었으니. 아버지에게 감사드린다. 살아 생전 한번도 변변히 고맙다는 말을 건네지 못한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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