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의 망명지에서

동대신문l승인2020.12.2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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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객석 편집장·음악평론가 송현민

무대를 잃은 예술가들은 난민이 됐다. 망명지는 유튜브와 네이버TV 같은 온라인이다. 공연예술계에 신조어로 등장한 ‘무관중 생중계’가 망명과 함께 이 시대의 새로운 공연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떠올랐다. 그는 ‘기술복제 시대’에 예술은 복제기술을 통해 특정 공간을 넘어 속세로 퍼져나간다고 말했다. 예술의 민주화는 이 같은 복제 기술에 힘입어 진화해 온 게 사실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루브르 미술관에 가지 않아도 모나리자의 미소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예술이 아우라를 상실한다고 말한 이도 벤야민이다. 공연장의 예술이 스마트폰으로 배달되는 지금 우리의 상황도 이와 같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소수만 즐기는 예술이 공공재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이 된다.

무엇보다 아우라의 상실이 두렵다. 우리는 아우라를 느끼기 위해 공연장으로 향한다. 세상과 단절되는 탈(脫)세속의 공간에 자신을 스스로 감금시킨다. ‘감동’은 그 감금 끝에 주어지는 감성적 보상금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잃어버린 감동’보다 ‘새로 찾아온 기술’에 더 열광한다.

아도르노(1903~1969)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건 야만이다”라고 말한 이다. 예술이란 아픔이 담긴 가슴팍에 들이댔을 적에, 그 소리를 듣게 해주는 청진기와도 같다. 그림에는 아픔이, 음악에는 음표로 치환된 비명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을 통해 참상과 아픔을 보려 하지 않는다. 예술이란 그저 ‘힐링’ ‘위안’ ‘위로’와 동의어로 생각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예술이 지닌 다양한 기능과 의미를 스스로 축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올해 100주년을 맞았다. 진행 여부를 놓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축제는 시대의 아픔과 함께 진행됐다. 헬가 라블 슈타들러 대표가 인터뷰를 통해 한 말이 감동적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위기를 이겨내기 위한 프로젝트로 시작됐다. 유럽 전역이 폐허로 변했던 1914~1918년, 이 축제를 통해 전쟁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고자 했다. 나 또한 예술을 일상생활을 위한 단순한 장식이 아닌 삶의 의미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축제의 정신에 따라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싶었다.”

여흥만 즐기는 축제가 아니다. 시대의 아픔을 돌아보고 전쟁과 고통으로 흐트러진 삶의 질서를 잡기 위한 사유의 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보다 ‘기술’을, 아픔보다 ‘힐링’만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예술에 대해 진지하고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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