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보는 세상이야기3]누구를 뽑을 것인가?

불교와 진화생물학으로 풀어 본 정치인 감별법 동대신문l승인2020.05.1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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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 남을 위하다 보니 나의 명예가 높아진 사람

▲ 김성철 교수 
불교문화대학 불교학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다.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기 전에는 지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공언했던 사람인데,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선거운동원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기뻐한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유가 남을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는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일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국회의원 선거의 패러독스다. 더 이상한 것은 매번의 선거 때마다 이런 장면을 수십, 수백 번 목격했음에 불구하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유권자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다 그렇고 그런 줄 알기 때문에 묵인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일은 국회의원 선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바쳤던 마하트마 간디 역시 그로 인해 인류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남을 위해 살았는데, 근대 이후 최고의 성자로 추앙받는다.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의 삶을 산 슈바이처도 마찬가지였고 라틴아메리카의 민중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체게바라기도 마찬가지였다. 남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희생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명예를 드날렸다. 이타행의 패러독스다. 인류의 정치사 역시 패러독스의 연속이었다. 전체 군주제를 몰락시킨 프랑스혁명정신의 수호자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황제로 추대되는 나폴레옹. 지배계급을 타도하자는 집단이 다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게 되는 공산주의, 과거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작금의 현실에서도 정치적 활동은 철저하게 패러독스적이다. 국민을 위하겠다며 결국은 자신의 명예를 드날리게 되는 정치인, 그러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불전의 가르침 가운데 “천지는 나와 뿌리가 같고, 만물과 나는 한 몸이다(天地與我同與 萬物與我一體).”라는 말이 있다. 역경승 구라마습의 제자로 중국인 가운데 불교의 공(空)사상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다고 칭송받았다는 승조(僧肇, 384~414) 스님의 가르침이다.

온 우주와 내가 하나인 이유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홀로 발생하는 것은 없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큰 방이라는 생각은 작은 방이라는 생각을 깔고 있고, 남이라는 생각은 나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다. 세계와 나 역시 별개가 아니다. 세계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세계가 있다. 그래서 남을 위한 행동이 결국 나를 위한 행동이 되고 만다. 남에게 한 행동인 듯하지만, 사실은 그 남은 나와 뿌리가 같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부메랑을 저쪽으로 던지면 마치 고무줄로 끄는 것처럼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온다. 업을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이치 역시 그 구조가 이와 같다. 내가 남에게 선행이나 악행을 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행복이나 고통으로 변하여 나에게 되돌아온다. 불교에서는 이를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얽혀서[緣] 발생[起]하기 때문에, 즉 연기(緣起)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순환이 일어난다. 나의 모든 행위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올바른 정치인이든, 잘못된 정치인이든 겉보기에는 모두 “남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고, 그에 상응하여 그의 명예도 높아진다.”

그러면 올바른 정치인과 그렇지 못한 정치인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올바른 정치인의 경우 남을 위하여 일을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자신의 명예가 높아지는 반면, 잘못된 정치인은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남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시늉을 한다. 양자는 그 근본목적이 다르다. 사회참여에서 동기의 선후(先後)가 다른 것이다. 올바른 정치인의 이타적 참여는 ‘남을 위함’이 ‘자신을 위함’에 선행한다.

 

진화생물학 – 삶의 궤적에 정의감과 이타심이 절절이 배어 있는 사람

  진화생물학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은 물론이고 이타심 역시 진화의 산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꿀벌의 경우 여왕벌만 새끼를 낳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한다. 같은 암벌인데도 일벌들은 희생만 하다가 목숨을 마친다. 다윈 진화론에서 말하는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이나 성 선택(Sexual selection)과 같은 적자생존의 원리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이타적 행동이다.

  그러나 이들 개체의 희생으로 인해 그 친족(親族)들이 보전되고 번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함으로써 난제가 해결되었다. 후대의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를 친족선택(Kin selection)의 원리라고 불렀으며, 유전자(Gene)와 연관시켜서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 한 해밀턴(Hamilton:1936~2000)이었다.

  친족의 경우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가 높다. ‘친족 간 친밀성의 정도’는 ‘유전적 유사성’에 비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개체(individual)의 희생으로 인해 동족(同族)이 번영한다고 해도, 자기희생을 하는 개체의 수가 너무 많으면 그 집단은 멸종한다. 모두 앞장서서 자기 희생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외부의 위협이 있을 때 아무도 자기희생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집단 역시 멸종할 것이다. 외부의 위협을 피해서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동족군(同族群)이 와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생을 통한 개체의 손실보다 동족의 이득이 커야하며 동족 내에서 각 개체들의 유전적 유사성이 높아야 한다.

  해밀턴은 이런 통찰을 rB>C라는 공식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r’은 친족성(Relatedness)의 약자(略字)로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1’을 최대치로 한다. ‘B’는 이익(Benefit)으로 이타적 행위의 수혜자가 얻는 2세 생산의 이득을 의미하며, ‘C’는 비용(Cost)으로 이타적 행위의 행위자에게 가는 2세 단종(斷種)의 손실을 의미한다. 요컨대 어떤 개체의 희생(C)으로 인해서 그 손실보다 동족의 이득(B)이 클 경우 그런 동족은 번성하는데, 개체들이 유전적으로 친밀할수록(r) 번성의 정도 역시 커진다는 뜻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행동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개체인 ‘나’를 위한 이기적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한 이타적 자기희생으로 궁극적으로는 동족의 유전자를 보전해 준다. 인간사회의 ‘악’은 거의 모두 전자에서 비롯되고 ‘선’은 대부분 후자에 속한다. 탐욕,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들은 모두 개체인 ‘나’만을 보존하기 위한 감성들이다.

  반면에 많이 베풀고, 해치지 않고, 빼앗지 않으며, 속이지 않는 등의 선행은 ‘남’을 배려하는 행동들이다. 선이나 악은 진화과정에서 ‘친족선택’의 원리에 의해 수만 년 간 솎아지면서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된 가치들이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이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이지만,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보더라도 선하게 살아온 사람, 남을 위해 살아 온 사람, 이타적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공적인 일을 맡겨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이타적이고 누가 이기적인 사람인지 어떻게 감별할 것인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추적해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내가 잘 살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의 경우 그가 아무리 지역민을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시늉을 해도 그 목적은 권력을 움켜지고 자신의 명예를 날리는 이기적인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일했던 삶의 비중이 큰 사람, 그의 삶의 궤적에 정의감과 이타심이 절절이 배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정치나 행정과 같은 공적인 일을 맡길 경우 우리 사회는 보다 행복하고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으로 봐도 그렇고 진화생물학으로 해석해도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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