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

‘경사스러운 고을’이라고 이름 붙여진 경주읍성 최호택l승인2015.06.0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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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링경주 - 경주읍성

경주읍성은 경주시 북부동과 동부동에 걸쳐 현재 남아 있는 경주의 옛 성벽을 말한다. 경주읍성의 전체모습은 일제 강점기에 전적으로 훼손돼 찾아볼 길이 없지만, 그나마 성벽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옛 흔적을 남기고 있어서 퍽 다행한 일이다.

흔히들 경주라고 하면, 누구나 신라 천년의 역사만을 머리에 떠올리고, 그 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온 또 다른 천년의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동안 문화재 보존을 위한 계획과 고도 육성에 대한 법률이 여러 차례 바뀜에 따라 신라 왕경 복원은 물론 경주읍성 복원에도 많은 차질을 가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성벽 앞 길가의 안내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읍성 소개가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이 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시 동부동·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의 둘레가 4,075자, 높이가 12자였으며 돌로 쌓은 성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집경전과 관아, 그리고 우물 8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성벽 언덕에는 몇 그루의 고목이 남아있어서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계림초등학교 정문 앞쪽 길가에는 거대한 석재들로 지어진 집경전 터가 남아 있고 옛 경주여중 자리였던 환경공단 본부 건물 정원에는 이와 연관된 주춧돌과 돌계단들이 남아 있다. 집경전은 조선 태종 때 창건해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했으며 세종 때 건물을 다시 고쳤다고 한다. 선조 때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하기 위해 영정을 강릉으로 옮기고, 그 집을 집경전구기라 했는데 인조 9년(1631)에 화재로 소실됐다.

지난 날 경주에도 읍성 안에 사는 사람들과 성 밖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은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을 경주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한양에서는 천상의 28수를 따라 스무 여덟 번 치는 보신각의 인경소리에 성문이 닫치고, 33천을 향해 서른세 번을 치는 바라소리에 따라 성문이 열렸다.

경주에서도 읍성 동문 앞 봉황대 서북편에 있던 에밀레종소리에 따라 성문이 열리고 닫쳤다고 본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성 바깥 시골사람들과 이들이 가져 온 물건들을 사러 나온 성안 사람들이 서로 만나 흥정이 이뤄지게 됐는데, 지금도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이 유명하다.

지금 경주의 봉황대 거리 양편에 전시해 둔 사진과 옛 읍성 터에 세워진 게시판의 사진에서 보듯이 성문을 중심으로 지게에 물건을 지고 팔러 온 장꾼들과 성안 사람들이 한데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하나 같이 머리를 땋아 내리거나 상투를 튼 사람들이 갓이나 방립을 쓰고 흰옷을 입고 있어서 백의민족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라시대에는 경주라는 이름이 없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넘겨 준 후, 고려 태조 왕건이 ‘경사스러운 고을’이라고 붙여 준 이름이 바로 경주다. 그리고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정승에 봉하고 사심관이 된 김부 정승에게 경주를 식읍으로 줬다.

신라의 전성시대 왕경은 후대의 경주읍성과 같은 소규모로 된 모습이 아니고 그 규모가 훨씬 큰 삼십오방으로 돼 있었으며 초기에는 금성, 월성, 명활산성과 같은 형태로 도성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주읍성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신라 천년이 끝나고 그 후 천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읍성은 고려 현종 때 처음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고려의 역대 임금 중에서 제 8대 현종은 신라와 경주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경순왕이 백부 김억렴의 딸을 태조 왕건에게 소개해 신성왕후가 됐으며 신성왕후가 낳은 안종의 아들이 바로 현종이다. 신라의 인물 중 설총을 홍유후로 최치원을 문창후에 추봉한 것도 현종이다. 고려 왕조의 초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중기를 거쳐 오면서도 신라 왕조의 중심지였던 경주 출신의 인재들이 많은 활약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인종 때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충렬왕 때 삼국유사를 저술한 승 일연도 모두 경주인이었으니 말이다.

 


최호택  webmaster@dg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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