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지장보살상 봉안기념 -지장스님의 삶과 이해

당(唐) 구화산(九華山)의 신라 지장(地藏)선사 동대신문l승인2009.11.30 17:46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지난 11월 20일에 기념관 대강당에서 100주년 기념관 준공식와 함께 지장스님상 봉안식이 거행되었다. 100주년 기념관입구에 봉안된 지장스님의 목조상은 중국정부가 조성하여 국내에 보낸 것으로 그동안 봉은사에 모셔져 있다 본교로 이운하였다. 지장스님은 신라왕족출신으로 당나라로 들어가 구화산에서 지장도량을 열었으며, 중국의 민중들에게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널리 존경되고 있다. 스님에 대한 자료는 국내에는 없고, 현재 중국에만 남아있다. 그리하여 지장스님에 대해서는 그동안 중국의 자료와 중국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으며, 역사적 고증을 거치지 않은 설화적인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착각한 부분이 많다. 지장스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존에 발표한 김영태교수의 연구논문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1. 스님에 대한 자료
지장스님의 행적을 담은 기록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成寺記)」(813),『송고승전(續高僧傳)』(988)의 「지장전(地藏傳)」, 『원고승전(元高僧傳)』(원대)의 「지장전(地藏傳)」, 『신승전(神僧傳)』(1417)의 「석지장전(釋地藏傳)」, 『구화산지(九華山誌)』(1938) 등이 있다. 그리고 『불조통기(佛祖統紀)』(1269)의 「법운통색지(法運通塞志)」와 『전당시(全唐詩)』(1706)의 「구화산시선」등에 단편적으로 수록된 자료가 있다.
「구화산화성사기」는 당의 비관경(費冠卿)이 813년에 기록한 것으로 지장이 입적한(803) 후 10년만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화성사는 지장이 창건하여 머물렀던 사찰이므로, 그 내용은 개산조인 지장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글을 지은 비관경은 ‘내가 산 아래 한가로이 기거하면서 어렸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삼가 기록한다.’고 하였다. 산 아래에서 살면서 지장스님에 대해 어릴 적부터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가장 신빙성이 높은 자료라 할 수 있다. 그 외 후대의 자료들은 이 글을 참고로 하여 작성하였다 할 수 있다.
『송고승전』은 송의 찬영(贊寧) 등이 988년에 황제의 명으로 편찬하였으며, 「감통편」에 「지장전」이 실려 있다. 지장스님에 관한 전기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그 외 『원고승전』의 「지장전」과 『신승전』의 「석지장전」등은 모두 『송고승전』의 내용을 옮겼다 할 수 있다.
『구화산지』는 위의 자료들과 기타 자료들을 종합하여 가장 자세하게 지장스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과는 다른 부분들이 많다.
 

   
▲ 중국 안휘성 구화산 육신보전 지장보살상


2. 스님의 행적
「구화산화성사기」와 『송고승전』의 「지장전」 내용을 중심으로 지장스님의 행적을 살펴보자.
스님은 성이 김씨이며 신라의 왕족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마음이 자애로웠다. 키가 7척이나 되고 정수리가 솟아 골상이 기이하고 100명의 장정을 대적할 만큼 힘이 장사였다. 그는 스스로 “이 세상의 모든 학문 중에 오직 불교의 제일의(第一義)만이 내 뜻에 맞는다.”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들어가 여러 곳을 다니다가 구화산을 보고는 마음이 끌려서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봉우리 쪽을 향해 오르다가 골짜기 가운데 넓고 평평하며 양지바른 남향의 땅을 발견하였다. 토질이 좋고 물도 좋아 그곳의 바위사이에 자리를 잡고 수행에 전념하던 중 독사에 물렸는데, 그때에 문득 아름다운 부인이 나타나 예를 올리며 약을 주면서 “어린 애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제가 샘물을 솟아나게 하여 사과드리고자 합니다.”하고는 사라졌다. 그로부터 샘물이 흘렀으며 사람들은 구화산의 산신이 샘물을 솟아나게 하였다고 하였다. 평소 4대부경(『화엄경』?『보적경』?『반야경』?『열반경』)을 지송하고자 하여 잠시 산을 내려갔다가 남릉(南陵)의 어느 신도의 도움으로 뜻을 이루고서 산으로 돌아왔을 뿐 세속과 단절하고는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였다.
지덕(至德, 756~757) 연초에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올라왔다가 깊은 산 속에 홀로 수행하는 스님을 발견하였다. 스님의 거처인 석실 안을 들여다보니 다리가 부러진 솥에 흰 흙과 조금의 쌀로 지은 밥이 있을 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경탄하여 말하기를 “스님께서 이와 같이 고행을 하시는데 저희들이 몰랐습니다.”하였다. 그리고는 서로 함께 절 지을 일을 의논하였으며, 몇 해 지나지 않아서 큰 사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건중(建中, 780~783) 초에 고을을 다스리던 군수 장엄(張嚴)이 지장스님의 고풍(高風)을 높이 받들어 조정에 아뢰어 화성사(化成寺)라는 절 이름을 걸게 되었다.
스님의 도풍(道風)이 널리 알려지자 본국 신라에까지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구화산으로 찾아왔다. 사방에서 수많은 문도들이 몰려들어 먹을 식량이 없게 되자 스님은 바윗돌 밑에서 하얀 흙을 파내었는데 그 흙은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돌았으며 매우 부드러워 마치 밀가루와 같았다. 그 흙을 삶아 대중이 식사하여 겨우 목숨을 보존함에 모두 몸이 바짝 말랐으므로 사람들은 지장스님의 문도들을 고고승(枯槁僧)이라고 불렀다.
스님의 나이 99세가 되는 정원(貞元) 19년(803) 여름 홀연히 대중들을 불러 이별을 고하고 가부좌를 하고서 입적하였다.스님의 시신을 함속에 앉혀두었다가 3년 만에 열었더니 얼굴이 살아있을 때와 같았으며 탑 속으로 옮기는데 골절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쇠사슬이 흔들리듯 하였다 한다.

   
▲ 중국 안휘성 구화산 육신보전 지장보살상 측면

3. 스님에 대한 바른 이해
1) 스님은 왕자가 아닌 왕족이다.
『구화산화성사기』에는 신라왕자김씨의 근속(近屬)이라고 하였으며, 『송고승전』에는 신라국왕의 지속(支屬)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왕족이 왕자로 바뀌어가고,  근년에는 중국의 유영지(劉永智)교수 등이 지장스님은 696년에 태어난 성덕왕의 맏아들 김수충(金守忠)이라고 하였다. 성덕왕은 그의 형 효소왕이 후손이 없이 702년에 16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므로 696년은 효소왕의 나이가 10세이며, 성덕왕은 그보다 나이가 어리므로 후손이 있을 리가 없다. 가장 오래되고 신빙성이 있는 『구화산화성사기』와 『송고승전』에 근속 또는 지속이라 되어 있으니 왕족으로 보아야 한다.
2) 지장은 스님의 법명이며 김교각은 바른 호칭이 아니다.
초기의 자료에는 스님을 지장이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오면서 스님을 김교각(金喬覺)이라 부르는데 이는 스님을 부르는 바른 호칭이 아니다. 스님은 출가하면 세속의 성을 붙이지 않으며, 가장 오래된 기록인 『구화산화성사기』나 『송고승전』에도 교각이라는 이름은 없다. 1933년에 중국의 홍일(弘一)법사가 쓴 「지장보살성덕대관」에 ‘『송고승전』에 싣기를 당의 영휘(永徽, 650~655) 때에 신라왕족으로 성이 김이고 이름은 교각인데, 중국에 이르러 구화산에 살았다고 한다.’고 하였고, 1938년에 덕삼(德三)이 쓴 「구화산지」에 ‘『신승전』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멸도하신 지 천오백년에 보살이 신라의 왕가에 태어났으니 성이 김이고 호가 교각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인용한 『송고승전』과 『신승전』의 원문에는 교각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구화산을 지장신앙의 성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지장스님을 지장보살의 화현으로 받들면서 교각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설령 교각이라는 호가 있었다면 교각 지장선사(스님)이라고 해야 한다.
3) 선(禪) 수행과 고행으로 대중을 이끌었다.
지장스님을 선사(禪師)라 일컬은 기록은 『불조통기』이다. 이전의 자료들에서는 선사라 하지 않고 그냥 지장이라고만 하였다. 신라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될 때에 출가 사찰이나 스승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며 당나라에서도 구화산에서 비로소 자리를 잡아 스스로 수행하였으므로 아무 종파에 속하지도 않았다 할 수 있다. 4대부경을 지송하기 원하였다하므로 교학승으로 보기 쉬우나 4대부경이란 실은 교가(敎家)에서보다도 중국 선림(禪林)에서 일컫는 말이므로 교학승으로만 볼 수 없다. 그런데 산 아래 마을의 사람들이 ‘서로 함께 절을 지으려 논의하였다[相與同構禪宇]’는 기록에서 지장스님을 위해 절을 지으면서 선우(禪宇)라 한 점과 산 속에서 혼자 수행한 점 등으로 미루어 선 수행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흰 흙을 먹고 살아 스님의 문도들이 여위고 말랐다는 내용으로 보아 지장스님은 선수행과 고행을 하였으며, 대중을 이끌면서 자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흰 개 선청(善聽)과 금지차(金地茶)
스님이 당나라에 들어갈 때에 신라본토의 토종 흰 개인 선청을 데리고 들어갔으며, 신라의 차인 금지차를 가지고 들어가 구화산에 심었다는 내용들이 후일의 기록에 나타난다. 이 토종의 흰 개가 바로 삽삽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불교계에서 지장보살에게 예경을 할 때에 “지심귀명례 좌보처 도명(道明)존자 우보처 무독귀왕(無毒鬼王)”이라고 하는데 좌보처인 도명은 지장스님의 상좌이고 우보처인 무독귀왕이 선청이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지나친 해석이 아닌가 생각한다.
금지차란 지장스님이 신라에서 가져온 차라 하여 그렇게 부르며, 지장스님이 구화산에 심었다고 한다. 1669년경에 유원장이 지은 『개옹다사(介翁茶史』에 ‘구화산에 공경차가 있는데 이는 김지장이 심었다. 대체로 안개와 구름이 끼어 기후가 늘 온화하고 젖어있어 다른 땅에 심은 것과는 맛이 다르다.’라고 하였으며, 「구화산지」에는 ‘줄기는 비어서 가는 대와 같으며, 김지장이 가져온 종자라 전한다.’고 하였다.
오늘날도 구화산에는 많은 차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현지인들이 차를 만들어 ‘구화산차(九華山茶)’ ‘지장불차(地藏佛茶)’라 부르며 관광객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 구화산(九華山)

4. 중생을 교화하는 지장보살의 화현
지장스님은 신라왕족출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가 구화산에서 철저한 선 수행과 고행을 통해 민중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산신이 샘을 솟아나게 한 신이적인 요소와 지장이라는 스님의 법명으로 말미암아 생전에 이미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입멸후 앞산이 울고 바위가 떨어졌으며, 종을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으며 입적한지 3년이 지나도 안색과 모습이 생전과 같은 이적을 보임으로써 당시의 민중들은 자연스럽게 스님을 지장보살의 화현으로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장스님이 머문 구화산을 지장보살도량으로 삼았으며 오대산 문수보살도량, 아미산 보현보살도량, 보타락가산 관세음보살도량과 함께 중국 4대 보살도량이라 하였다. 구화산은 오늘날까지 육신보전(肉身寶殿)의 지장탑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철헌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동대신문  press@dongguk.ac.kr
<저작권자 © 동대신문 경주캠퍼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동대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38066 경상북도 경주시 동대로 123 (석장동,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   |  대표전화 : 054)770-2057~8  |  팩스 : 054)770-2059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민영
Copyright © 2019 동대신문 경주캠퍼스. All rights reserved.